"현대적 삶에서 예술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 로드첸코는 1891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카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5년 모스크바로 가서 스트로가노프 미술학교에 다녔다. 같은 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영향을 받고 추상적으로 드로잉을 제작했다. 1916년 타틀린의 초청으로 '상점'전에 출품했다. 1917년 타틀린, 야쿠로프 등과 카페 피토레스크의 실내 장식으로 환경 미술 개념의 선구자가 되었다. 피토레스 크는 모스크바 예술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자유 분방한 단골집으로 지금은 이 실내 장식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1918년 말레비치의 <흰색 위의 흰색>에 답하여 <검정 위의 검정>연작으로 그려 그와 노선을 달리 했다. 1920년 '구축주의 그룹 강령'을 발표해 객관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술을 실용적인 목적에 종속시켰다. 1921년 '5x5=25' 전시회에 빨강, 파랑, 노랑의 모노크롬 캔버스를 /최후의 그리들/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추상미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예술을 삶으로 전이시키는" 작업을 더 잘 이행하기 위해 인쇄술과 산업 디자인 분야로 관심을 돌렸다. 베르토프의 기록영화 <영화-진실>의 자막을 제작하기도 하고 그 밖의 포스터와 광고 제작에도 참여했다. 1923년 마야코프스키가 창간한 '레프'지의 표지와 레이아웃을 그렸고, 마야코프스키의 시집 <이것에 관하여>를 위해 포토몽타주를 제작하였다. 1924년부터는 사진가로 활바히 활동했다. 그는 피사체를 비스듬히 바라 보거나 위에서 똑바로 내려다보고 찍어 의도적으로 사물을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시점을 채택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1930년대 초 /부르주아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며 스탈린 관료주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20년간을 스탈린 관료제와 갈등을 빚으며 사람들과 단절된 채 가난과 비통함 속에 살아야 했다. 그는 1956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1. 주요 활동
알렉산더 로드첸코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전후에 형성되고 활동하였던 당대의 많은 문화운동과 교육기관, 예술과 조직, 그룹 등과 맥을 같이 한 러시아 아바가르드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생산주의 예술'엥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다. 그의 사진사적 업적은 모더니즘 형식주의 미학의 사진을 자율적 예술로서의 작가의 지위에서 생산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실천한 인물로 대표된다. 러시아에서 "상산주의 예술'의 이념은 예술에 있어 모든 미학적 의도를 포기하는 대신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을 위한 스스로를 새로운 집단의식을 고취하는 도구로 정의된다. 로드첸코는 1928년 < 뉴 레프>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적 삶에서 예술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 예술은 낭만을 향한 광중이 있는 동안까지만, 아름다운 거짓말과 속임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까지만 존재를 계속할 것이다. 교양 있는 현대인이면 모름지기 아편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처럼 예술가의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
2. 작품의 특징
1) 생산 속의 예술을 모토로 작업을 하다.
예술을 '문화생산'의 맥락으로 놓았던 러시아 생산주의 예술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 문화영역에서의 예술의 적극적인 개입을 실천해 냈다. 로드첸코는 생산주의 예술이 공식적인 이름을 가지고 본격화되던 1920년 인쿠크(예술문화학교)에서 교육하면서 당시 많은 이론가들과 함께 생산주의 이념을 만들어 갔다. 그 중 가장 급진적인 이론을 제시한 바 있는 니콜라이타라부킨은 1923년 <이젤에서 기꼐로>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생산주의 예술이 지행하는 바를 밝힌바 있다 .타라부킨은 새로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예술가는 리얼리티를 복제하고 전형적인 미술관의 형식 안에서 작업하는 '화가'가 아니라 '형태와 구조, 재료를 통해 실제의 공간 차원에서 실제의 물품으로의 전환'이라는 글에서 "예술의 죽음 혹은 이젤 회화의 죽음이 일반적인 예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고정된 결정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창조적인 본질로 남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창조적 본질로 인해 '미래의 예술은 좁은 의미의 순수미학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면서 활동의 영역을 확장 시켜 갈 것이며, 과학과 삶에 유기적으로 관계하면서 통합되는 형태가 될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논의들은 로드첸코의 예술을 추동하여 실제 문화 생산의 입지를 가능하게 하였다.
2) 급진적 형식주의를 완성하다.
로드첸코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엘 리시츠키와 더불어 사진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진보를 위한 이상적인 도구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작업은 혁명의 실천으로서 보다 예술로서의 의미를 더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진심으로 자신의 사진 작업들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시각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고, 선전의 도구러서 사진을 실험했지만, 그가 죽고 난 후 우리는 그를 예술가, 그것도 발군의 예술가로 보고있다. 로드첸코가 주동이 되어 만들어딘 급진적인 형식주의 사진은 "생산주의 예술"이라는 모토아래 러시아 혁명직전부터 시작하여 혁명 후의 수년ㄴ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동시대의 서유럽의 모더니즘사진과 미국의 스트레이트사진의 스타일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에비게일 솔로몬고도는 <시각예술 무장해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 차이점을 서술하고 있다. "새롭게 소련사진을 구성했던 급진적 형식주의는 어떤 면에서 영미 형식주의와 같은 바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매체의 본서은 그것의 미학을 적절히 결정해야 하고, 사진은 그것 고유의 특성들을 인지해야만 한다는 공감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폴 스트렌드 등에 해당되는 영미식 형식주의는 전적으로 모더니즘 적 위치를 표방했었고, 소련 형식주의와 뚜렷이 구별된다. 궁극적으로 칸트 미학에서 분지된 영미식 형식주의는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의 자율성, 순수성, 초월성의 개념과 함께 러시아 형식주의에는 하나의 저주와 같은 것이었다. "
3.의의
로드첸코는 서른이 되기 전에 시월 혁명을 맞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아래 러시아 구성주의의 내적논리와 혁명적 문화의 절박성을 통감한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이젤 페인팅을 거부한다. "회화에 있어서 모든 이즘이 붕괴되어 갔다 이것은 내게 있어 소새으이 시작이었다. 이젤 페인팅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 이즘이 무덤으로 갔고, 서성이던 마지막 연정의 희망도 깨어졌다. 나는 진실이 죽어버린 집을 떠났다. 창조는 종합이 아니라 분석인 것이다. "라고 고드첸코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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